AFTER WORK · After Hours
목적지는 지도 위의 점이지만, 여행의 감각은 영화와 음악과 책 속에서 먼저 만들어진다.
어디로 떠나든, 무엇과 함께하느냐가 그 여행의 기억이 된다.
영화가 보여준 낯선 도시의 또 다른 얼굴.
이 일곱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나라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공통적으로 남기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그 도시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다음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혹은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이 작품들을 한 편씩 꺼내 보길 권한다.
세트제팅(set-jetting).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트렌드를 가리키는 말로, 촬영 현장(set)을 향해 제트기를 타고 날아간다(jetting)는 뜻이다. HBO 드라마 <화이트 로터스> 시즌 3가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진 뒤 태국 여행 예약이 전년 대비 300% 이상 증가했고,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 공개 이후 파리의 특정 골목을 찾는 여행객이 평상시의 수십 배로 늘었다는 통계는 영화와 여행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를 잘 보여준다. 스크린이 곧 여행지가 된 시대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다섯 편은 단순히 ‘예쁜 배경’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들을 고른 기준은 하나다. 보고 난 뒤 그 장소가 새롭게 보이는가. 빼어난 경치 때문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이 그곳에서 겪는 일 때문에 그 도시가 달리 보이는 영화들이다.
먼저 이 장르의 고전 한 편을 소개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1995)는 오스트리아 빈이 배경이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건 관광 명소가 아니다. 심야의 와인 바, 다리 위, 묘지 옆 벤치 등 두 청춘 남녀가 하룻밤 동안 대화를 나누는 장소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빈을 ‘모차르트의 도시’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가 아니라, 낯선 사람 앞에서 거침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도시로 기억하게 된다. 여행지에서만 가능한 어떤 대화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처음 알려준 영화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는 파리라는 도시를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핵심으로 보여준다. 자정이 되면 1920년대 파리로 이동하는 주인공은 피카소, 헤밍웨이, 달리가 활보하던 파리의 거리 곳곳을 걷는다. 영화를 본 뒤 파리의 골목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시간이 겹쳐 보인다. 이렇듯 영화는 현재의 도시 안에서 과거의 층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와 <투스카니의 태양>(2003)은 ‘삶을 바꾸는 여행’을 그려낸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리즈 길버트는 이혼 후 이탈리아, 인도, 발리를 1년간 여행하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음식, 기도, 사랑. 3개의 키워드가 세 나라의 문화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비슷한 결의 <투스카니의 태양>에서 다이앤 레인은 충동적으로 이탈리아 시골 빌라를 구입하고, 집을 고치면서 동시에 삶을 고친다. 두 영화 모두 여행이 ‘도피’가 아니라 ‘재구성’의 수단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서를 공유한다.
샬럿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2022)은 앞에 언급한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배경은 튀르키예의 평범한 리조트. 젊은 아버지와 열한 살 딸의 여름휴가를 담은 이 영화는 성인이 된 딸이 당시의 캠코더 영상을 되감기 하며 아버지의 표정을 다시 읽는 구조를 띤다. 2022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함께 보낸 여행의 기억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게 된다. 여행지는 기쁨과 해방만이 있는 곳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조용히 가라앉는 장소이기도 하다.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는 서울이 주요 배경 중 하나다. 서울에서 함께 자란 두 사람이 이민과 시간의 간격 때문에 멀어졌다가 20년 만에 재회한다는 이야기로,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의 자전적 감수성이 담긴 작품이다.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외국 감독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일은 아직 드문데, 이 영화는 서울의 골목과 공항 출국장을 낯선 감정의 공간으로 만든다. 익숙한 도시를 타인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2023). 2023년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 작품의 배경은 도쿄 시부야구의 공중화장실이다. 안도 다다오, 반 시게루 등 세계적인 건축가 16명이 ‘시부야 토일렛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설계한 도쿄 공중화장실이 등장한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관광 가이드북에는 등장하지 않는 도쿄의 표정이 보인다. 스카이트리가 바라보이는 도로, 홀로 저녁을 먹는 아사쿠사역 지하보도의 식당,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드리우는 공원, 단골 식당의 창가, 강변의 저녁. 여행자가 서두르며 놓치는 도시의 결이다.
해변, 호캉스, 비행기 안, 프라이빗 풀 그리고 숙소에서 맞는 밤을 채워줄 음악.
여행 가방을 쌀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이어폰이다. 목적지가 어디든, 귀에 꽂는 음악 하나가 그 시간의 온도를 결정한다. 이것들은 사진보다 오래, 더 선명하게 그 여행을 기억에 새긴다.
여행 가방을 쌀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이어폰이다. 목적지가 어디든, 여행 일정이 며칠이든 귀에 꽂는 음악 하나가 그 시간의 온도를 결정한다. 해변에서 파도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곡, 비행기 창밖으로 구름이 펼쳐질 때 이어폰 속에서 울리는 멜로디, 숙소에 돌아와 조명을 낮추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들리는 사운드. 이것들은 사진보다 오래 그리고 더 선명하게 그 여행을 기억에 새긴다.
모래사장에 누워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들을 때,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그 장면 전체를 완성하는 요소가 된다. 해변의 플레이리스트는 지나치게 무겁지도, 그렇다고 들뜨지도 않은 온도가 중요하다. 해리 스타일스의 ‘Watermelon Sugar’는 서머 팝의 교과서 같은 곡이다. 달콤하고 가벼우며 햇빛 냄새가 난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Cruel Summer’는 여름의 들뜬 감정을 신스팝 사운드로 담아낸 곡으로, 리조트 풀사이드보다 해변의 황금빛 오후에 더 잘 어울린다. 한로로의 ‘사랑하게 될 거야’는 국내 인디 신에서 단숨에 사랑받은 곡으로, 잔잔한 기타 리프와 담백한 보컬이 해변의 한가로운 시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호텔방의 조명, 높은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불빛, 서비스로 받은 샴페인 한 잔. 호캉스의 분위기는 음악 하나로 완전히 달라진다. 적당히 세련되고, 꽤 나른하고, 기분 좋을 만큼 들뜬 사운드가 필요하다. 두아 리파의 ‘Levitating’은 디스코 팝 특유의 경쾌한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과하지 않다. 호텔 로비부터 루프톱 바까지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는 신스웨이브 리듬이 도시 야경과 딱 맞아떨어지는 곡이다. offonoff의 ‘춤’은 국내 R&B 인디 신의 명곡으로, 느리고 몽환적인 사운드가 고급스러운 공간의 무드를 완성해 준다.
“음악과 장소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비행기 안은 특별한 공간이다. 일상과 여행 사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어딘가에 있는 시간. 창밖으로 구름이 펼쳐지면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에 젖게 된다. 콜드플레이의 ‘Yellow’는 비행기 안에서 듣기에 아주 좋은 곡 중 하나다. 별과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랫말이 창밖 풍경과 묘하게 겹친다. 뢰이베이의 ‘From the Start’는 재즈와 팝을 넘나드는 서정적인 곡으로, 긴 비행의 고요한 중반부에 어울린다. 혁오의 ‘Hug Me’는 영어 가사와 몽환적인 사운드로 비행기 안이라는 공간의 고독을 잘 담아낸 곡이다.
프라이빗 풀은 해변보다 조금 더 여유롭고, 조금 더 감각적인 무드가 어울린다. 텐션이 너무 높으면 튀고, 너무 낮으면 졸립다. 악틱 몽키스의 ‘Do I Wanna Know?’는 느릿한 기타 리프가 특징인 곡으로, 선글라스를 쓰고 선베드에 누운 장면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차일디시 감비노의 ‘Redbone’은 레트로 소울 펑크 사운드로 저녁노을 진 풀사이드에 딱 맞는 온도를 가진 곡이다.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은 제목만큼이나 여름의 끝을 붙잡는 듯한 감성이 깃들어 있다.
낮에 실컷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아온 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오늘의 장면들을 되감기 하는 시간. 이때의 음악은 무언가를 더 채우려 하지 않고, 그 여운을 천천히 내려놓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Apocalypse’는 나른한 침묵으로 이끄는 듯한 슈게이징 팝으로, 가사와 멜로디 모두 여행지의 밤과 어울리는 고요한 정조를 띤다. 테임 임팔라의 ‘The Less I Know the Better’는 사이키델릭팝 특유의 몽환적인 질감이 자정의 숙소 분위기를 완성해 준다. offonoff의 ‘Lonely’는 어둑한 조명 아래 혼자 혹은 둘이서 듣기에 더없이 좋은 곡이다.
음악과 장소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어떤 곡을 들으면 특정 장소가 떠오르고, 반대로 어떤 장소에서 처음 들은 음악은 평생 그 풍경과 붙어 다닌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음악과 기억의 맥락 효과’라고 설명하는데, 음악이 재생될 때의 환경이 기억의 저장에 강하게 관여한다는 이론이다. 즉 여행 중 무엇을 듣느냐는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여행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읽을 때 더 빛나는 책들.
짐을 꾸릴 때 책 한 권 넣을 자리는 필히 남겨둬야 한다. 음악이 여행의 무드를 조성한다면, 책은 여행의 밀도를 결정한다. 책이 형성해 주는 ‘맥락’이 여행의 질을 바꿔놓는다.
짐을 꾸릴 때 책 한 권 넣을 자리는 필히 남겨둬야 한다.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읽는 책, 숙소 테라스에서 커피를 곁에 두고 펼치는 페이지, 여행 마지막 날 밤 침대에서 마저 읽는 마지막 챕터. 책은 여행의 시간을 채우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 장소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음악이 여행의 무드를 조성한다면, 책은 여행의 밀도를 결정한다. 어떤 책은 여행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고, 어떤 책은 같은 풍경을 사뭇 다른 각도로 보게 한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으며 파리를 걷는 것과, 아무런 맥락 없이 파리를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경험이다. 책이 형성해 주는 그 ‘맥락’이 여행의 질을 바꿔놓는다.
1986년부터 3년간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유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그는 이 시간 동안 <노르웨이의 숲>을 완성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일본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앉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이 책은 솔직하게 담아낸다. 관광지 소개나 맛집 정보는 없다. 그 대신 시장에서 좋은 올리브를 고르는 방법, 셋방의 난방이 작동하지 않는 밤, 낯선 언어로 이웃과 나눈 짧은 대화 같은 것들이 있다.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것’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는 왜 여행을 가고, 막상 도착하면 왜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은가? 알랭 드 보통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워즈워스, 보들레르, 고흐 같은 예술가들이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끌어오면서, 여행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풀어낸다. 이 책의 미덕은 여행지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여행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어디서 오는지, 왜 우리는 낯선 곳에서도 익숙한 자신을 만나는지를 설명한다.
“책이 형성해 주는 ‘맥락’이 여행의 질을 바꿔놓는다”
1938년 일제강점기의 타이완. 일본인 여성 소설가 아오야마 치즈코와 타이완인 통역사 왕첸허가 종관철도를 타고 섬 전체를 여행하며 음식을 먹는다. 러우싸오, 타이완식 카레, 무아인텅 등 음식 묘사가 워낙 생생해 읽는 내내 식욕이 당긴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미식 여행기가 아니다. 두 여성이 나누는 대화 안에는 식민지 권력, 언어의 박탈, 정체성의 균열이 조용하고 날카롭게 녹아 있다. 소설 형식을 빌린 메타픽션 구조도 독창적이다.
뉴욕에 사는 젊은 의사 마들렌이 할머니로부터 파리의 아파트를 상속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 아파트에는 이미 누군가가 살고 있다. 파리의 골목, 센강 변, 오래된 아파트 건물.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페이지 터너 형식이라 읽는 속도가 빠르고, 그러면서도 파리의 거리와 건물, 카페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13년 차 여행작가 우지경이 수영을 시작하면서 쓴 에세이. ‘앞으로 안 나아가는 기분’이란 제목은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물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인 감각에서 왔다. 그런데 그 감각은 수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책에는 해외 수영장의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외국 여행지의 수영장에서 홀로 물속에 들어가는 일. 그것이 어떻게 낯선 도시를 다르게 경험하게 하는지,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어떻게 글 쓰는 사람의 무기력을 건드리는지를 솔직하게 풀어낸다.
여기 소개하는 다섯 권의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행과 얽혀 있다. 어떤 책은 특정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어떤 책은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를 사유하며, 어떤 책은 낯선 곳에서 물속에 몸을 던지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행 에세이부터 소설까지 장르도 무드도 제각각 다르다. 여행의 목적지가 어디든, 짐 가방 한쪽에 이 중 한 권을 넣어보길 권한다. 책은 가볍지만, 그것이 채워주는 여행의 두께는 꽤 묵직하다.